제목 포도밭처럼
작성자 리사
작성일 2006-05-29
조회수 22680


< 포도밭처럼 > / 나 희 덕


저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살고 싶었다
산등성이 아래 몸을 구부려
낮게 낮게 엎드려서 살고 싶었다
숨은 듯 숨지는 않은 듯
세상 밖에서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다
입 속에 남은 단 한 마디
포도씨처럼 몰고
끝내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
둥근 몸을 굴려 어디에 처박히고 싶은 꿈
내게 있었다, 몇 장의 잎새 뒤에서

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의 술틀에 던져진 포도알이었는지 모른다
채 익기도 전에 으깨어져 붉은 즙액이 되어 버린,
너무 많은 말들을 입 속 가득 머금고 울컥거리는,
나는 어느새 둥근 몸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
포도가 아닌 다른 몸이 되어 절벅거리며, 냄새가 되어
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퍼져가면서,
세상을 적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

저 멀리 야트막한 포도밭의 평화,
아직 내 몸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아
사라진 손으로 사라진 몸을 더듬어본다
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던 것처럼


.........빗방울 조금 떨어지던 5월말의 주말 저녁나절
........ 가을 날의 해넘이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
...........늦봄이 가을 날의 스산함처럼 그렇게 쓸쓸하던 하루
.............그렇게 또 한주가 갔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