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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기소개서 유년기: 1938년 5월 5일(단오날), 경기도 용인의 자그마한 농촌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출생.7살 때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산 주인이 쫓아 왔다. 나무하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갔다.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. "우리 아버지는 늙었고, 형은 일본 군대에 잡혀 갔어요. 내가 나무를 안 해 가면 우리는 밥을 할 수가 없어요." 그 날부터 산 주인은 언제든지 와서 나무를 해 가라고 허락해 주었다. 약국사환 시절: 시골에서 근근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고등학교진학을 하지 못한 채 1년 간 농사를 짖고, 서울로 올라와 약국의 사환으로 밥만 얻어먹는 취직을 하였다. 아침 일찍 일어나 약국 문 열고 저녁 늦게 문 닫는 일 외에 낮에는 빙초산을 소분 하는 일을 했다. 100홉 정도의 빙초산 큰 유리 독 뚜껑을 열면 빙초산이 물 상태의 초산으로 변하고 이것을 손으로 콘트럴해서 한 홉 자리 병에다 넣는 일이다. 초산이 손에 묻으면 물론 손은 허물이 벗겨진다. 이 때의 상처를 나는 아직도 훈장처럼 가지고 다닌다. 야간상업고등학교: 약국을 박차고 나와서 자전거를 하나 사가지고 약품배달을 시작했다. 아침에 주문받고 점심 때 배달하고 저녁때 수금을 하였다. 두 달을 하니 등록금이 생겼다. 중학교 졸업한 지 2년 만에 나는 꿈에 그리던 선린상업고등학교 야간부학생이 되었다. 새벽에는 안현필 선생 영어학원, 낮에는 약 배달, 밤에는 학교. 1학년 성적은 75명중 35등이었으나 졸업할 때는 반에서 2등을 하여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합격. 촌놈 신나던 시절이다. 삼성그룹 입사: 군대를 필하고 생각하는 청년이 된 나는 소설을 써보자던 문학소년의 길을 떠나 사회로 진출할 것을 결심했다.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서 마침 편입생 모집을 하여 응시했다. 200명 정도가 시험을 보았는데 마지막 7명이 합격을 하였다. 졸업 후 삼성그룹계열의 중앙일보에 입사했다. 7년 만에 기획실장대행을 하다 삼성전자로 옮겨서 입사 9년 만에 이사로 승진했다. 일리노이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의 수학: 다시 1년 후 상무로 승진하면서 삼성전자의 국내영업을 총괄하게 되었다. 3년이 지나자 10년 후발인 삼성전자가 주요품목에서 금성사를 앞서게 되었다. 그러나 1979년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회사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.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. 이것은 개인적으로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. 미국에서의 수학 2년 후에 나는 계속해서 해외 업무를 맞게 되었고, 그것이 새로운 트랜드를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. 빌 게이츠 회장의 초대: 삼성으로 복귀하면서 나는 아주 작은 소프트회사인 삼성SDS를 맞게 되었다. 삼성그룹에서 몇 안 되는 적자회사. 나는 이 회사에서 6년을 근무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세계의 신기술을 도입했다. 2천명이던 직원의 수는 7천 5백 명으로 늘고 매년 흑자에 더욱 재미있는 것은 대학생들이 가기를 희망하는 1등 회사의 지위를 연속 3년을 계속했다. 1997년 봄 빌 게이츠 회장은 5천만 달러 짜리 집을 짓고 그 집들이에 세계에서 70명 정도를 초청했는데 삼성SDS사장인 나를 초청하였다. 정보통신부 장관: 1998년 12월20일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. 골프를 치고 있는데 하우스 프로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청와대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으니 전화를 걸어 보라는 것이었다. 다음 날 나는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명을 받았다. 1주일 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로 나를 불렀다. "나는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"제3의 물결"이란 책을 읽은 후 그 방면의 책을 많이 읽었지요. 시대가 변하고 무엇인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지금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소. 남궁 장관은 전문가이니 그 일을 해야 합니다." IT인프라: 1주일 후 나는 "정보화의 길"이란 12쪽 짜리 보고서를 들고 다시 청와대로 갔다. "저는 정치적인 측면은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. 그러나 산업화의 불을 지핀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. 그 분은 경부고속도를 먼저 만들고 그 주변에 수많은 공단을 포도송이처럼 만들어서 왕성한 생산 활동을 하였습니다. 정보화도 마찬가지입니다. 정보고속도의 건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. 정보고속도로 주변에서 수많은 미래의 업종과 직업들이 탄생할 것입니다."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 1개월 전 정보통신부에서 인터넷 사용자 3천만 명 돌파 기념식을 가졌다. 그 곳에 국회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나를 초청해 주었다. "남궁 장관, 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오늘을 예측했습니까?" "상상 못했습니다. 그 때는 다만 이것이 길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." 그룬트비히의 길: 덴마크의 선각자 그룬트비히는 66세에 초선의원이 되어 84세까지 의원생활을 하면서 수 많은 찬송가, 시, 대학에서의 역사강연 등을 하였다. 그리고 9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 교회에 나아가 목회활동을 하였다. 우리 나라도한 사람 정도 공부하는 원로 국회의원을 갖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!